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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석종근과 함께 “그림으로 읽는 한자 세상”
한자는 그림문자이다. 현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자를 형상의 그림으로 그려 보는 연습을 하면 현상이 보인다. 여기에는 상징성의 단순화, 철학성의 객관화 ......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사천의 역사 인물(4) 효당 최범술 스님

  효당 스님은 곤양군 양포면 금진동 율포(현. 서포면 금진리 율포)에서 아주 작은 해변의 어촌마을 이지만 효당 같은 거목을 출생 시킨 대단한 어촌이다. 아버지 경주 최씨 최종호와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 태어났다.
하동군 양포면 두리동 주막거리에 이사를 하고 7세에 양포사립개진학교에 다녔지만 당시 학교는 태극기를 게양하였지만 일본인 교사가 태극기를 뜯어 내리고 일장기를 달고 학생들과 학부형을 큰 교실에 모이게 한 다음 천황궁성 그림과 메이지 천황의 사진을 걸고 경례를 강요하였다.
일인교사는 학생들에게 효당을 일본어 교사에서 국어 교사롤 부르라고 하고, 본래 국어교사는 조선어 교사로 불러야한다고 야단을 쳤다.
학생들은 서로 짜고 일인교사 배척과 동맹휴학을 할 것을 작정하고 이 동명 휴학에 대한 이유의 진정서를 만들어 곤양군수 김선재와 경상남도 도장관에게 제출하였으나 김선재 군수는 일본헌병을 동원하여 이 일을 수습하고 주모자로 지목된 효당과 신영곤, 임성년, 변기홍을 퇴학 처분 하였다.
그 후 1915년 곤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3살(1916)에 다솔사의 월초 스님 법하에 들어와 출가하여, 다음해(1917)에 해인사 학림에 들어가 수계를 받았다.(법명· 금봉, 은사 임환경)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영남지역에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통 받았으며, 1922년 일본에 유학하여 1922년 박열과 서로 만나게 되었다.
1923년 도쿄 릿쇼중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고, 1933년 동경의 다이쇼 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23년 박열·박홍근·육홍균 등과 불령선 인사를 조직하여 “불령선인지”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박열의 일본천황 암살계획을 돕고자 상해로 잠입하여 폭탄을 운반하여 왔으나, 대역 사건에 연루되어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29일씩 피검 당하기를 3년 동안 하였다.
1923년 김법린 등과 비밀 결사인 만당을 조직 하였고, 1933년 조선불교 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해에 명성여자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일본 유학시절 인도 승 달마바라로부터 전하여 받은 불사리 3과를 범어사에 기증하여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이는 달마바라가 붓다가야의 대탑을 수리하고 그 탑중의 불사리 약간을 나누어 받아 세계 여러나라에 전한 것 중의 일부이다.
1934년 사천에 광명학원을 설립하였고, 1936년 다솔사 불교 전수강원을 설립했다. 1937년 고려 대장경을 인경 하였고, 1943년 9월부터 13개월 동안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상남도 경찰국에 구금 되었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에 임명되었고, 그해 해인사 주지가 되었으며, 국민대학을 창설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의 5·10 선거 당시 사천·삼천포에서 출마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1년 진주에 해인중고등학교를 창설, 이듬해에 해인대학을 설립하고 이사장 및 학장에 취임하였다.
세월의 무상과 인생무상의 연기 법칙을 따라 스님도 쇠잔일로를 어김없이 맞았다. 노년의 마지막이 자기 개인적 문제가 가까운 인척간의 갈등으로 인해서 성장하고 정들었던 다솔사을 떠나게 된다. 봉명산은 효당을 품 밖으로 내 보내지 않으면 안 될 비운을 뿜어내게 되었다.
효당이 봉명산 다솔사를 떠나기 불과 기일 전에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한국차인회”를 태동시킨다. 경향각지에 효당을 존경하거나 아끼는 많은 제방배가들이 다솔사 스님 방에 모여서 한국차인회를 결성하였다.
취지는 차 문화 보급, 차 강사 양성, 지회 결성을 해서, 전국적 운동으로 확대 보급하자는 것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자품인 차인회를 만들고 며칠 뒤에 진주를 거쳐 서울 정릉에 있는 정덕 스님 절에서 쓸쓸한 노년기의 마지막을 보냈다.
스님은 세수 75세를 누리시다가 1979년 열반에 드셨다. 스님의 유해는 다솔사 입구 석탑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봉명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이고 그가 가꾸고 심어둔 차나무는 연연익수를 더해간다. 다솔은 면모를 변화시켰고 천년 고사목만이 외롭게 다솔을 지키고 서 있다.
다솔사 아래에는 효당 스님에게 출가하여 차를 만든 추전 김화수 서화가와 효당의 종손 봉화 스님, 그리고 응송차를 직접 배운 원표 스님이 차밭을 가꾸고 차를 만들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백과. 추전의 차 한시 문집.국립진주박물관. 다솔사와 차, 효당차

주필 김을성

2019년 06월 13일 10시 44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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