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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양위 부호군 책임자 묘지발견 오위도충부 소속 박응철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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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10대 명품 섬, 아름다운 섬 신수섬 둘레 길을 따라 구석구석 볼거리 구경도하고 역사의 흔적을 찾아 협동조합 사천향토사연구회 회원들과 조심스럽게 답사의 길을 간다.
육지와 섬, 섬과 섬, 바다가 끊어진 듯 이어지는 삼천포 앞 바다에서부터 여름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왜구들의 침입이 많았던 섬, 신수 섬은 400여 년 전 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는 동네가운데 우물과 왕산 밑의 우물 을 식수로 이용하였다. 지금은 진양호의 물이 들어온다.
답사 온 회원들과 푸른바다를 바라보면서 역사의 현장 박응철의 묘지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사천의 진산 와룡산과 삼천포 시가지를 보면서 답사 장소에 도착했다.
신수 섬은 왜구들의 침입이 많았던 섬이다. 이곳에 신수 동민 김영식씨의 말에 의하면, 왜장의 무덤이 있다는 말이 전해 올 만큼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했던 곳이 라고 한다.
김씨의 인도로 대구마을 산모롱이를 지나기 전에 왜장의 묘지가 있는 곳에 나무가 어지럽게 자란 곳을 찾았다. 답사 온 회원들은 간단한 예를 하고 어지럽게 자란 나무와 잡초를 제거하였다.
김씨는 이 묘지가 주민들은 묘비의 확인도하지 않고 왜장의 묘지라고 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온 지금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검은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검은 비석은 동네 분이 세 조각을 내어서 주위에 버렸다고 하지만 찾을 수 가 없다고 하여 김학명(신수섬 출생)씨가 계획을 세워 신수동 주민들과 의논하여 찾을 것이라고 한다. 이 비석을 찾으면 박응철의 새로운 기록을 알 수가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사천향토사연구회는 답사를 통하여 묘갈이 있는 곳의 비문을 확인한 결과 왜장의 묘가 아닌 조선시대의 박응철의 부부 묘를 확인하고 뒤편에 있는 묘지는 확인 할 수가 없다.
이 묘각에 새겨진 비문은 조선시대의 이곳에 주둔 했던 오위도총부 용양위 부대 책임자 박응철과 그의 부인을 안장한 내용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묘갈은 200 여년이 지났지만 선명하게 글씨가 보였다.
◆전면 묘갈의 글
가선대부행용양위부호군박공지묘(嘉善大夫行龍양衛副護軍朴公之墓)
◆전면 묘갈 해설
가선대부:조선시대 종2품문무관의 품계.
용양위:조선시대의군사조직인 오위중의 하나.
부호군:조선시대 오위도총부에속한 종4품 벼슬(현재의 계급으로 중령 대대장급)
오위도총부:조선시대 중앙군인 오위를 지휘하고 감독하던 최고 군령기관
◆뒷면 묘갈 글
공지휘응철밀양인야생간무오년(公之諱應哲密陽人也生干茂午年)
이월삼십일졸간경오년십일월초이일장(二月三十日卒干庚午年十日月初二日葬)
배문창인황성명지여(配文昌人黃性明之女)
서천검덕구외손천손필현(서千儉德九外孫千孫弼賢)
신미팔월십구일 입 삭부(辛未八月十九日 入 朔夫)
◆뒷면 묘갈 해설
공은 응철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1798년(음력2월30일) 태어나, 1810년 11월초2일에 사망했다.
왕산 건해용해 자리의 언덕에 묻었다.
배우자는 본관 문창(창원)인 황성명의 딸이다.
사위 천검, 덕구, 외손 천손, 필현
신미년(1811년)8월19일에 세웠다. 마침(끝)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수도는 왜장의 무덤이 있다는 말이 전해올 만큼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했던 곳이다.
사천향토사연구회에서 2015년도에 처음 답사를 했지만 박응철의 묘지는 연구과정에서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본회는 진주국립박물관 신윤호 학예사에게 고증을 받기로 하여 의뢰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응철이 주둔한 부대는 왜구의 침입으로 있을 수 있지만 신미년의 년대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박응철의 묘지와 묘갈(비석)은 200년 이상 된 묘갈의 조선시대의 묘갈이라고 한다.
사천시는 신수섬에 있는 박응철의 묘소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둔한 용양위 부대의 책임자이면 조사 후 보존할 가치가 있다면 관계 기관에 문화재 신청하여 보존해야 할 것이다.
김을성 기자
kimes4000@naver.com 2019년 06월 27일 10시 43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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