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편지는 아직 내가 발 디딜 수 없는
어느 곳에도 나의 모든 기쁨과
눈물을 말해주는 나의 발걸음이다.
감히 말 못하는 서러운 생각도
감히 말 못하는 기쁨의 외침도
편지는 그 종이 한 장에 떨어 뜨린
나의 눈물까지 싣고 가던것을.

하늘의 제비는 해가 지는
저 산 너머 갈 수 있던가
언젠가 편지를 볼 때
그의 장벽없는 아름다움이
해뜬 곳에 갇혀있는
이 내 가슴을 서럽게 적셔올 때면
편지는 구속받는 희망의 눈빛에게
다시금 회한을 안겨주는
슬픈 꽃망울이 된다.

아, 아직은...,
눈물로 쓸 수 밖에 없는
내 어설픈 소망의 발걸음이여.
<고등부 운문 장원 삼천포고 3-4 강병철>

나의 자매 형재들에게 드립니다(편지)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 우산을 던져버리고 빗줄기에 온 몸을 적셔가며 춤을 추고 싶은 만큼 유혹적인 내음에 흠뻑 취했었습니다. 아마 오랜만에 내린 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의 정경을 즐겨가며 느긋하게 엄마가 차려주시는 얼큰한 김치찌개가 올려진 상을 받고, 사과 한쪽으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이 글을 쓰기 위해 공원에 올라오기까지 나는 단 한 순간도 당신들을 내 기억속에 상기시켜 본 적이 없음을 시인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그늘 아래서 가볍게 펜을 드는 것조차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사치스럽게 느껴져 죄인이라도 된양 진실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언제나 제 자신만의 행복감을 위해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당신들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무관심했던 제 마음의 자책 때문일 것도 같습니다.

언젠가 법정스님께서 쓰신 '무소유'를 읽고 모든 소유하는 것이 곧 고통이라는 참된 진리에 고개를 끄떡여가며 동감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발을 바둥거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런 생각마저도 배부른 자의 투정 정도로 당신들은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배를 곯아가며 하루하루가 고된 삶 자체인 당신들께 저는 감히 무엇을 얘기해 위로를 해야 할지…, 값싼 동정이나 입에 발린 추잡한 소리로 당신들께 연민을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늘 당신들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다는 거짓말도 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시간을 내어 당신들께 전하는 제 마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그 무엇으로 이어져 있어 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알고 반성할 수 있다는 사실은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바로 50여 년 간 헤어져 있었지만 같은 자매로 형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저는 지금 망산공원의 한 의자에 몸을 받치고 앉아 어느새 맑게 개어버린 하늘이 보내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려 가며 글을 씁니다. 매우 고요하고 지나치게 평온한 상태이지요. 내려다 보이는 뿌연 바다 저 끝 어딘가에서 지금도 끼니를 걱정하며 뜨거운 햇살에 살이 익는지도 모르고 땀을 흘릴 당신들의 모습이 생각나 순간, 몸서리 칠 만큼의 아릿함을 느낍니다.

당신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복에 겨운 한탄 정도라서일까요. 시간 흐르고 제가 나이가 들며 철이 들수록 당신들과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큰 비애를 실감하곤 합니다. 비록 전 당신들의 지친 어깨를 토닥여 주거나 기대어 쉴 수 있게 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들 속에서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없겠지만…, 물을 둘로 나눴다고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듯 당신들과 나 역시 언젠가는 같은 웃음을 지을거라 굳게 믿습니다.

이제 저는 이글을 마치고 돌아가면 언제나처럼 당신들을 제 생각 한쪽으로 또 밀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부족하지 않은 제 생활에 빈곤을 느끼고 때때로 사치스러웁게 눈이 멀기까지도 하겠지요. 그렇지만 결코 저버릴 수 없는 당신들과 나 사이의 무언의 약속. 그 끝이 마음뿐만 아닌 몸까지의 하나됨임을 우린 서로 알고 있을거라 믿습니다.

오래도록 간절이, 가슴이 에는 듯한, 그래서 이제 희미해져 낡아 귀퉁이가 으스러진 그 약속이, 통일이란 이름으로 반드시 지켜질 거라는 것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데 유난히 바람이 차가운 날입니다.
<고등부 산문장원 삼천포여고 2-행 정지운>

-2000년 7월 3일 ~ 7월 9일자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