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다를 여는 마을 벌교(1)

전라남도 벌교와 보성은 우리 시대의 아픔이 배어 있는 곳이다. 특히 일제 시대의 수탈과 압제의 역사, 해방이후의 반목과 대립 등 이 땅의 비틀리고 한맺힌 아픔으로 이어진 역사의 뒤안길이 벌교의 들녘과 바다, 벌교천에 가로놓인 소화다리 위에 어슴푸레 살아 숨쉬고 있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벌교에 닿자마자 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벌교 사랑회 사무실을 찾았다. 집에서 몇 번이나 전화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는데 사무실 유리창에 새겨진 전화번호와 내가 알고 있던 번호의 끝자리가 서로 달랐다. 문이 닫혀 있었지만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니, 여우삼 씨와 김양환 씨 등이 곧바로 도착했다. 이 분들은 벌교사랑회 소속 회원들로서 주로 자그마한 자영업을 하면서 외부에서 방문객이 오면 자기 일을 제쳐두고 이렇게 안내를 맡는다고 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우리 지역에도 지역사랑회가 있긴 하지만 이 곳처럼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분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우삼 씨 등 자기들의 승용차와 우리 차에 분승하여 안내를 해 주었다. 아직 본격적인 답사를 하기 전인데도 그들의 따뜻함이 이미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맨처음 시작한 답사는 현부자네 집이다. 벌교 버스터미널을 지나 순천 방향 도로변 주유소 좌측 샛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현부자네 집이 나온다. 중도 들녘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있는 이 기와집의 안채는 한옥을 기본틀로 삼았으되 현관문을 비롯해 곳곳이 일본식으로 지어져 색다른 건물양식으로 되어 있었다. 특히 솟을대문이 2층으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일행의 눈길을 끌었다. 산아래 펼쳐진 넓은 들을 감시하고 일꾼들을 감독하기 위해 2층에다 망루를 지었다고 했다. 솟을 대문의 높이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를 어느 정도 가늠해 주는 것 같아 괜히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정하섭과 무당의 딸 소화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다는 생각을 하니 필자의 마음은 금방 누그러져 낭만적인 쪽으로 기울어졌다. 지금은 아주 퇴락해 기와의 처마도 떨어져 나갔고 지붕은 군데군데 암키와와 수키와가 서로 짝을 잃은 듯 헝클어져 있었다. 솟을 대문 밖엔 자그마한 연못 하나가 기울어져 가는 현부자네 집과 어울려 더욱 정취를 더해 주고 있었다. 들녘을 가득 메운 벼들이 푸르게 고개를 쳐든 채 하늘 향해 뭔가를 시늉해 보이는 듯했다. 벼들의 고갯짓이 소설 속에 나오는 벌교 사람들의 걸죽한 입담처럼 푸르다. 현부자네 집 바로 곁에 있는 새끼 무당 소화네 집터를 훑어보며 내려왔다.
곧바로 우리는 회정리 교회로 갔다. 소설 속에서는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으로 이근술과 이지숙이 야학 교사로 있었던 곳이다. 이 교회의 구조는 그 당시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출입문이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자용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용으로 쓰였다고 하니 오늘의 우리 관습과는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안내한 곳은 김범우의 집이다. 좁은 골목길을 끼고 돌아 다다른 집은 정말 으리으리했다. 마침 주인이 마실갔는지 텅 비어 있었다. 집이 산자락에 있어서 그런지 대문 앞에 서서 팽팽하게 펼쳐진 고읍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현부자네 집에서 본 솟을 대문 위의 망루가 없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원래 집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망루 없이도 들녘을 충분히 감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참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이미 점심 때가 훨씬 지나 있었다.
여우삼 씨가 안내해 준 식당은 벌교 특산물인 망뚱어탕을 전문으로 취급했다. 함께 간 우리 일행 모두 얼큰한 망뚱어탕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소설 속에서 빨치산 염상진 등이 창고를 털어 곡식을 쌓아둔 곳인 홍교(횡계다리)로 갔다. 보물 제304호로 지정된 벌교 홍교, 벌교(筏橋)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홍교가 놓이기 전에는 뗏목다리를 놓고 건넜다고 한다. 걸핏하면 다리가 떠내려가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데 영조 때 이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가 만들어져 그 불편함을 덜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