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의 독립운동가 공적개요 성재 이시영 선생 』 (1869. 12. 3~1953. 4. 17)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이시영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조선조의 명재상이었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18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이 17세때부터 1909년까지 형조조랑, 홍문관 교리·수찬, 승정원 부승지·궁내부 수석참의·의부 교섭국장, 평안남도 관찰사, 중추원 칙임의관,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 판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907년 관직에 있으면서 형인 회영을 비롯,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 등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를 조직하자 이에 참가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한 뒤 1910년 말에 선생은 가산을 처분하고 40여명의 형제 가족들과 더불어 망명을 단행,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정착하였다.
선생 일가가 도착한 이듬해 4월에 그 곳 대고산에서 선생 등의 주도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고 한인의 자치와 독립군 양성을 위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확대되어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1913년 9월 선생은 북경에 가서 원세개를 통해 민주의 한인문제와 한중 연합전선 결성을 도모하면서 광무황제의 망명을 추진하였다. 3·1운동 소식을 듣고 선생은 이동녕, 이광 등 동지들과 함께 상해로 달려가 법무총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9월 통합정부가 수립된 뒤부터 해방후 임시정부가 국내로 돌아올 때까지는 주로 재무총장으로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에 헌신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이 조직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한 선생은 감찰위원장을 맡았고 1931년에는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미리 항주로 가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신처를 준비하기도 했다. 1934년 임시정부가 장기항전의 근거지를 찾아 먼 길을 이동하는 와중에도 선생은 「감시만어」를 지어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논파하였다.
해방후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제1진으로 환국한 선생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 성균관 총재, 대종교 원로원장 등에 취임, 건국활동에 매진하였다.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자료와 사진을 4월 한달동안 전시한다. 2003년 04월 03일 11시 10분 / 종합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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