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째 비다. 아침에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맑다가도 오후가 되면 갑자기 비를 퍼붓는 탓에 옷이 젓어서야 숙소에 돌아오곤 한다. 이런 날씨의 변덕에 적응이 안된 턱에 지난 번 암스텔담에서는 공연을 못했었다. 이러다가 여기 하이델베르그에서도 공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원래 하이델베르그는 1박 일정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암스텔담이 너무 지저분하고 복잡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독일의 구시가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하이델베르그의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에 다들 푹 빠져 하루 더 묵기로 했다. 파스텔 톤의 오래된 건물이 주는 포근함을 만끽하며 마을 옆을 흐르는 메카강가를 거닐고 있으면 그 동안 힘든 여정에 찌든 노곤함을 모두 씻어내고 마음이 평온해진다.?그런?분위기?때문에 여기 하이델베르그는 예전부터 수많은 철학자와 음악가 문학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등 걸출한 철학자들이 거닐던 철학자의 길을 걷고 있노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철학에 빠지게?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학구적인 분위기가 과거에만?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이 곳은 인구의 3분의 1이상이 대학생인 만큼 거리는 젊은 대학생들로 항상 활기차다. 대학식당과 학교앞 호프집에서 열심히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한국의 대학생으로써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오랜만에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머리를 싸매고 취업공부에만 열심이거나, 불안한 사회문제로 순수한 학문증진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우리의 대학문화와 사회를 생각하니, 그들이 부러워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두 발 딛고 살아가야 할 곳이 대한민국, 내 조국이라면 그곳에서 부딪히고, 경험하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지금보다 더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지금 나는 그들보다 더 중요한 여행이라는 공부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자랑스럽게 그들에게?내보이면서 말이다. 이렇게 위로 아닌 다짐을 해본다.
우리가 여기 하이델베르그에서 1박을 추가한 또?다른 이유는 풍물공연을 위해서다. 도시 자체도 마음에 들기도 하고 , 그동안 궂은 날씨 탓에 공연에 너무 목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하루 더 묵은 하이델베르그는 쉬이 마른 하늘을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전에 우산을 쓰고 관광지를 돌아보았지만, 다들 오늘도 비 때문에 공연을 못 할거라는?실망감때문인지 어제와 다르게 풀이 죽어 있다. 우리는 비 때문에 관광도 여의치 않아 점심때가 되어서 숙소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대낮에 독일맥주에 취해 낮잠에 빠져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는 공연은 거의 포기하고 저녁이라도 얻어 먹어 볼까하는 생각으로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풀이 죽어 내려오는 우리를 보고 주인 아주머니와 식당에서 일하는 연변아주머니께서 공연 안하냐고 물어보신다. 그러자 어제 함께 묵었던 누나도 우리가 공연하는 모습을 너무 보고싶다며 어서 공연하자고 보챈다. 밖을 내다 보니 비는 그쳤지만 땅은 조금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공연을 해야 저녁밥도 얻어 먹을 수?있을 것 같다. 한동안 공연을 하지 않아 서로 부담감이 커서 공연을 할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와 누나의 응원에 힘을 얻어 일단?공연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
먼저 민박집 앞에서 아주머니를 위해 힘차게 휘몰이와 덧뵈기로 두드리고 뛰다가 마을앞 광장으로 나갔다. 연변 아주머니도 이내 따라 나오신다. 늦은시간이었지만 우리의 소리가 울려퍼지자 지나가던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한사람씩 모여들었다. 악이 마치자, 박수와 환호소리가 터져나왔고, 우리가 준비한 문구인 ‘Peace of Corea'를 외치는 사람도 있다. 이 뿌듯함에 힘든 지도 모르고, 그대로 악기를 매고 시가지거리로 악을 치며 걸아 나갔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호응에 미지기로 풀었다, 감으면서 거리를 활보했다. 이렇게 신나게 한판치고 나면 낯설던 거리도 우리동네처럼 친숙해진다.
그렇게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니, 연변 아주머니께서 메뉴에도 없던 닭도리탕과 된장찌게로 푸짐하게 저녁을 차려주신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풀이 죽어 있던 우리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리고, 오랜만에 벅찬 보람감으로 서로 말이 많아졌다. 항상 이렇게 풍물공연을 한번 하고 나면 서로 힘을 얻는다. 함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날 저녁 배부르게 먹고 주인아주머니와 같이 묵는 누나와 우리는 자정이 가깝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뒷날 아침 기차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난 우리에게 연변 아주머니께서 부탁하나를 하신다. 근처에?한국 식당이 있는데, 어제 우리의 거리공연을 보고 그 식당아주머니께서 그냥 지나친 게 너무 아쉬워서 오늘 우리의 거기서 한번 쳐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국땅에서 생활하는 교포의 부탁이어서 기차시간을 조금 미루고 그 식당에 찾아갔다. 우리를 반기시던 식당 아주머니께서는 식당 안 곳곳에 악을 한번 울려달라고 하신다. 거리공연을 생각하고 온 우리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식당이며, 부엌이며, 화장실을 다니면서 풍물을 쳤다. 그랬더니 공연은 자연스럽게 정월대보름 날 하는 ‘지신밟기'가 되어버렸다. 마당에서는 덕담도 한마디 주고 받으며 욱신욱신 독일땅을 밟아 주었다. 이런 모습이 신기한지 독일사람들이 한사람씩 구경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식당앞 거리에서 신나게 한판 치고 있으니, 주방장 아저씨와 주인아주머니께서 복채까지 챙겨주신다.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아주머니의 정이라 생각하고 받았다. 물론 우리의 주머니가 궁핍한 탓도 있었다. 쌀대신 라면으로 받고 나서려고 하자, 점심이라도 먹고 가라신다. 기차시간! 이 가까워 거절을 했지만, 조금 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하는 것은 영락없는 한국아주머니였다. 어딜가나 한국 아주머니의 따뜻한 정은 변하지 않나보다.
아쉽게 우리를 떠나 보내며 남의 나라에서 우리의 풍물소리를 듣고 나니, 답답했던 가슴이 다 후련해지는 것 같다고 하신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이 행동들이 이런 분들에게는 아주 큰 선물이 되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젊은 혈기에 단지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할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참으로 보람된 일 인것 같다. 새삼스럽게 젊음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진다. 다들 이런 자신의 행동가치를 제대로 못 느끼지만 스스로 이 여행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럴 수 있는 우리가 너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