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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스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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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을 떠난 야간열차는 아침이 되자, 파란 호수와 하얗게 눈덮힌 알프스를 간간히 비추기 시작한다. 다들 야간이동의 피곤함에도 이내 이국적인 경치가 주는 신기함에 아침잠을 깨고 창 밖을 내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이내 열차는 스위스의 첫관문인 취리히에 닫았다. 아침역은 항상 활기차다. 아침이 주는 느낌도 느낌이지만, 하룻 밤을 지내고 맞이하는 또 다른 나라의 풍경이라 더욱 그런 것 같다. 역은 항상 떠나고 도착하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부자나라답게 깔끔하게 정돈 된 역과는 달리 우리는 부시시한 얼굴로 역대기실에서 다음 기차시간을 기다리면서 부족한 잠을 청했다. 화장실 사용료가 1프랑, 우리나라 돈으로 900원이나 받으면서 자기 나라를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경찰이 역대기실에서 짐을 풀어놓고 잠들어 있는 우리에게 짐을 잘 챙기라면서 꼼꼼하게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을 보니, 그래도 받는 만큼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노력은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의 목적지는 호수사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이름 지어진 ‘인터라켄(INTERLAKEN)'이라는 곳이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호수 중간역에 내려서 유람선으로 인터라켄으로 들어가는 행로로 정했다. 여행 안내소에서도 한국사람들이 많이 다녀간 까닭인지, 몇마디 하지 않고도 한국말로 된 여행책자를 보여주자마자, 무엇을 원하는 지 알았다는 듯이 열차시간과 유람선 이용방법을 자세히 적어준다. ‘그래. 관광으로 먹고 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우리는 파노라마특급열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 이름에 걸맞게 기차는 알프스의 높은 산을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그 유명한 스위스의 풍경들을 쉴새없이 보여준다. 유람선을 타기위해 기차에서 내리는데, 또 다른 한국여행객 한무리를 만났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잘 모르는데, 그 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해 온다. 알고 보니, 빈에서의 거리공연때 우리를 보았단다. 그 공연을 보고 사진도 많이 찍고 좋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며 벌써 우리 팬이 되었다나. 그 말에 괜히 우쭐해진다. 한국에서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여기 이국땅에서 이렇게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유람선으로 호수 근처의 마을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내리쬐는 햇볕에 잠이 들어 그만 얼굴을 다 태웠다. 뭐 그다지 더 태울 것도 없지만. 우리가 숙소를 잡은 곳은 라우터부르넨. 이곳은 산자락에 있는 작은 마을로 빙하가 만들어낸 U자곡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양 쪽에 있는 절벽들에서는 시원한 빙하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정면에서는 눈덮힌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각종 레포츠로 일년 내내 관광객이 북적대는 곳이다. 보통 한국 배낭여행객들은 이 곳에 와서 비싼 레포츠를 많이 하고 간단다. 기차가 3000m가 훨씬 넘는 알프스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도 하고, 행글라이더도 타보고, 폭포에서 뛰어내리기도 하는 기상천외한 레포츠의 유혹을 그냥 저버리기는 힘든 모양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스위스사람들이 관광객들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기에 요금이 어마어마하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인 우리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대부분 여행객들은 다른 나라에서 끼니까지 걸러가면서 모은 돈으로 여기서 다 쓰고 간다니, 우리는 변명이지만 그런 사치스러운 행동에 반항하는 마음으로 그 돈으로 그동안 못 먹었던 음식이나 실컷 먹자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저녁이 되자, 미리 묵고 있던 여행객들이 숙소로 돌아왔다. 그 중에는 빈에서 같은 숙소에 묵었던 누나도 있었다. 함께 스위스 전통음식인 퐁뒤를 슈퍼마켓에서 사서 맛있게 요리해 먹고(이것도 레스토랑에서 사 먹으려면 1인분에 2만원이 넘는다. 그런데 우리는 만원으로 숙소에 묵고 있는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그 누나가 별 보러 가자는 말에 밤늦게 숙소를 나섰다.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코를 적신다. 비록 삼천포등대 끝에서 보는 밤하늘보다 결코 이쁘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룻동안 꾹꾹 눌러왔던, 하나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래도 그 아쉬움에 가슴이 가득차는 것 같아 그렇게 나쁠 것도 없었다. 어쩌면 이런 밤하늘에 어울리는 감정일 수도 있겠다 싶다.
뒷날 아침 우리는 나태해질대로 나태해져 해가 중천에 떠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조용한 마을에서 풍물을 쳤다가는 가까이 있는 알프스에서 눈사태가 날 지도 모를 일이고, 계획을 잡았던 레프팅도 돈이 없어 못하고 있으니, 해가 떠도 조용히 휴양 나온 사람처럼 멀리 알프스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까운 건 돈보다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걸어서라도 저기 저 알프스에 발자국이라도 찍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뭐 기차도 올라가는 데 사람 걸어가는 길이 없겠나. 사람걸어가는 길이 없으면 기차길 따라 가면 되지.’싶어 길을 나섰다. 하지만 700m가 넘는 절벽을 기어오를 수는 없기에 절벽 위까지만 구간티켓을 끊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계단식 기차가 덜컹거리면서 절벽을 오르자, 알프스가 조금씩 다가왔다. 역시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고, 하고 나면 기분도 좋아지는 법이다. 우린 알프스를 오르려면 무조건 10만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야 되는 줄 알았는데, 구간티켓 단돈 6000원으로 그것도 스스로 찾아서 산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알프스라고는 하지만 걷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산책로가 잘 되어 있었고, 기차를 타고 가면 쉽게 지나칠 수 있었던 수많은 들꽃들과 작은 마을들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조용히 자연을 거닐면서 그동안 가지지 못했던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여행이 여기서 잠시 쉼표는 찍는 듯 싶다. 그리고 산을 내려오면서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으로 정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도를 보고 온 마을을 빙빙 둘러 숙소로 돌아오자, 이미 해는 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스위스 알프스의 마지막 밤. 알프스의 밤은 폭우로 젖어 있다. 여행객 누군가가 가져온 라디오에서는 비틀즈의 ‘Let it be'가 흘러나오고 다들 저마다의 이야기로 일기장을 채워 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일정도 10일 남짓. 내일 스위스를 떠나면 가야할 나라도 이탈리아만 남게 된다. 남은 날이 적어질수록, 가야할 곳이 적어질수록 아쉬움만 커져간다. 그만큼 남은 일정은 지금까지보다 더 열심히 여행을 해야 할 것 같다. 오랜만에 조용히 나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밤이다.
2003년 07월 17일 11시 45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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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