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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의 독립운동가]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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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 2. 19~1916. 2. 27)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승희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47년 경북 성주에서 영남 주리론의 대통을 이은 한주 이진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유학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여 영남 주리론의 대통을 계승하면서 위정척사론을 정립하고,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섰다.
개항시기에는 척사상소를 올려 무분별한 개국에 반대하고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옹호하였다. 나아가 1895년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 등 문인들과 함께 포고문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하고 열강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수백여 명의 유생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와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주한 일본군사령부에 일본의 배신과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 이로 인해 대구경찰서에 피체되어 옥고를 겪고 이듬해 4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인 1907년 국권회복을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갔다. 자신의 향리인 경북 성주에서 국채보상단연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 담배를 끊고 국채를 보상하여 국권을 되찾자고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편지를 보내 일본의 침략 만행을 낱낱이 폭로하고, 한국이 독립주권국가임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인해 광무황제가 강제 폐위되자 그 부당성을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1908년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되자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김창숙 등 문인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이상설·유인석·안중근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자를 국내로 보내 독립운동자금을 널리 모금하는 한편, 그 자금으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나섰던 것이다. 만주와 노령의 국경지대인 밀산현 봉밀산에 황무지를 구입하고 100여 가구의 한인동포를 이주시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여 한흥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독립군 양성의 기반을 닦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광복되기 전에는 결코 귀국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중국의 동지들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한인공교회를 창립하고, 상해의 박은식 등과 연락하여 언론기관의 설립과 국사교육을 논의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여 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1916년 2월 27일, 70세를 일기로 봉천성 북문 밖에서 광복의 날을 보지 못한 채 망국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2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2006년 02월 09일 9시 44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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