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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석종근과 함께 “그림으로 읽는 한자 세상”
한자는 그림문자이다. 현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자를 형상의 그림으로 그려 보는 연습을 하면 현상이 보인다. 여기에는 상징성의 단순화, 철학성의 객관화 ......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고성 학동마을 최씨 고가와 육영재, 서비정을 찾아서(3)

  ·서비(西扉) 최선생 순의비(殉義碑)와 서비정(西扉亭)
서비 최우순(崔宇淳 1832~1911)공은 7세때에 이미 한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을 경탄케 할 정도로 당대에 지고한 유학자로서 일본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공은 일본이 있는 동쪽이 싫어 호 청사(晴沙)를 서비(西扉 서쪽 사립문)라 고치고 출입을 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는 등 신명을 바쳐 애국 충정을 불태웠다.
한일합방을 강행한 일제는 전국에 명망높은 유림에게 일왕의 소위 은사금(恩賜金)이라는 것을 주어민심을 무마하려는 술책을 써 왔다. 공에게도 은사금을 받으라고 여러차례 강요하다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거부하자 일제는 헌병을 파견하여 총칼로서 강제로 연행코자 하므로 공은 날이 밝으면 가자하며 그날밤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절한 순국 의사였다. 이 날이 바로 1911년 신해년 3월 19일 향년 80세였다.
서비 최선생의 장한 순절 소문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과 지사들이 공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기 위해 도곡산록(학동마을 안산 기슭)에 사당을 건립하고 서비정이라 이름하여 해마다 향사를 모시어 공의 의절을 추모하여 왔다. 서기1945년 해방이 되자 전국의 유림과 유지 그리고 많은 고성군민이 서비 선생의 숭의회를 조직하여 공의 순절의 정신과 행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학동마을 입구에 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상이 서비선생 순의비와 서비정에 각각 새겨진 국가보훈처가 세운 안내 표지판의 내용이다. 이처럼 선생은 고성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선비로 널리 추앙 받았다. 또 선생은 수백석의 재물을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휼(救恤)하는데 쓰는 등 선비로서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세가지 길 중 그 마지막 길인 순의의 길을 택한 것이다.
첫째 불의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것이요. 둘째 현실에서 물러나 은둔하여 도를 지키는 것이며 셋째 이도 저도 아닐때는 의로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했다.
이처럼 이미 국권이 침탈당하고 팔순 고령의 선비로서 취할 수 있는 그 마지막 길을 택한 것이다. 선생이 순의하고 유림장으로 45일 장례를 치르는 동안 당시 수 많은 유림, 문중 대표와 명문 사대부들의 조문이 이어져 인산 인해를 이루었고 장지에 모인 조문 군중들에게 산노루가 잡히는 등 신비한 광경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유림을 중심으로 조의금과 성금을 모아 선생의 향사를 모시기 위하여 서비정을 건립하였으며 선생의 큰 아들 정모(正摸) 호 운계(雲溪)도 선생의 3년상을 다하는 날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나라 잃은 父, 子 선비의 기개를 가히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광복이후 서비정에 이어 순의비가 건립되었으나 선생의 순의 이후 일제치하에서 압박을 감내해야 했던 후손들은 선생의 증조부로 부터 물려받아 평생 가꾸어 왔던 생가마저도 처분하고 마을을 떠나 살아야 하는 고충을 어떤 보상과 위로로 다 하겠는가?
2011년 즉 올해는 선생이 순의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선비가 남긴 문집(文集)의 국역화와 현충시설(순의비, 서비정)의 성역화와 정비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다음호에 계속>
취재: 이동호 편집이사
4000news@naver.com

2011년 09월 29일 12시 17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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