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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화재없는‘한가위’를 위한 약속
더위가 한 풀 꺽이고 이제 저녁이면 겉 옷을 챙겨 입어야 할 정도로 선선한 날씨는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가을은 늘 추석을 데리고 온다. 추석 명절이 보름 가까이 다가오면서 부모님과 ......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비토리사건 하봉마을 현지답사 후기Ⅰ

  지난달 8월 28일 오후 3시 사천 다물 연구회에서는 비토리사건을 다시 취재하여 사건의 진행과 결말을 다시 확인하여보고 어떤 형식으로던 진실화해 위원회에 신청도 해보고 마지막에는 사건 현장에 작은 위령비라도 세워야겠다는 마음으로 나서게 되었다.
아주 작은 위령비라도 사건 현장에 세우는 과정의 험난함은 예상하고 시작하려는 일이지만 무거운 첫발걸음은 사천만의 흐릿한 물결속에 토끼와 거북의 이야기와 함께 비토로 시작돠고 있었다.
하봉 마을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일제시대 존재했다던 일본인 거주지역 부터 찾아보았다.
왜냐면 일본인들이 개간했던 땅을 영복원사람들이 다시 사용하려 했던 것이 비토리사건의 발단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식으로 비슷하게 지어진 집들은 몇채 보였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기에는 세월이 너무나 지났으니, 아님 주민들이 일제의 잔재라고 없애버렸는지 옛 사진에서 본 오리지날 일본식판잣집 비슷한것은 찾을수가 없었다.(다음에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함)
마침 참깨를 털고 계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조심스레 하봉마을 그 사건 이야기를 꺼내었더니 할머니 하시는 첫마디 "그라몬 우릴 모다가 잡아갈라꼬 왔십미까"
"아입미다 시간이 얼매나 지냈는데 예"
나도 덩달아 사투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무언가 더 들어보려면 친근감이 있는 사투리로 하는게 좋겠다 생각하고 하는 말이었다.
같이 동행한 올빼미 무덤의 작가 강희진 상임이사는 거침이 없었다 . 케이비에스 방송사에 근무했던 경력이 많아서인지 접근도 핵심으로 치고들어갔다.
“그라몬 그걸 직접 봤십미까."
“하모 아아들은 오지 마라캐가 멀찍이서 구경만 했제"
“그래도 아즉까지 기억은 한다 아이가"
주민들(그당시 14~5세 정도 되었던 분들 )의 증언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마치 영화나 소설속 일들처럼 말했다.
곡괭이로 문딩이들을 하나씩 때려서 잡았다고 말하는 모습에 무어라 말할수없는 슬픔이 가득차 올랐습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하나는 삼천포고등학교 설립자이며 그 당시 유력자였던 정갑주 선생님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그 현장에 정갑주님의 생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리더로 보였으며 나중에는 천막안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영복원에서온 한센인 일행들을 지휘하며 저항했다는걸 들었다고 말했다. 한센인들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에는 하봉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났으며 스물여섯명이 살해당했고 수십명의 한센인들이 부상당했다고 했다.
하봉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다쳤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이사건으로 하봉마을 사람들 5~6명정도가 감옥에 갔으며 지금은 그 당시의 주민들은 모두 작고하고 후손들도 이 마을에는 거의 살지않고 있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감옥에 간 사람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비토리사건의 트라우마가 남겨져 정신적 고통이 심하다고들 했다.
지금 하봉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비토리사건 이후에 이주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어릴적에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도 대부분 고령자들이며 몇분 남지않았다 했다.
사천만엔 많고 많은 섬들이 즐비하였지만 실안 영복원에서 한센인들이 비토리섬으로 간 이유는 그곳에는 일제시대 일본인 거주지역이 있었으며 일본인들이 개간하다가 버리고간 적산농장이 있었고 또한, 관계당국에 그들 나름의 허가도 득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 소유였던 적산의 허가의 과정과 현재 누구의 소유로 되어있으며 하봉마을 사람들이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은 이땅을 그렇게까지 지키려했던것도 다음 취재과정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으며 비토리사건의 수사기록과 재판결과등은 다음 취재과정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늦여름 오후의 따가운 햇살에 갯가 넓은 밭에 심겨진 부추들은 아, 그 옛날의 슬픈 이사건의 진실을 아는듯 모두들 소복처럼 흰꽃의 겉옷들을 만장처럼 느려입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가르쳐준 현장에는 메밀이 심겨져 있었다.
제법 넓은 땅 이었다. 대략 6612㎡ 정도는 돠어 보였다.
배를 타고 오면 접근성은 좋아보였으나 토질은 아주 비옥한 상태는 아니었다.
농사짓기에 아주 아주 좋은 땅도 아니었는데 이 땅을 얻을려고 목숨까지 걸고 여기서....
이 얄굿은 땅을 지키려는자들과 확보하려는 자들이 두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굳게 쥐고 고함을 지르며 거칠은 욕설과 함께 “나가라 존말할때 나가라 이 문딩이 자슥들아"
“빨리 배타고 가라 쳐 쥑이기 전에"
“몬 나간다 여가 느그 땅이가 일본아들이 버리고 간땅이다 우린 절대 몬나간다 우리라꼬 요기 살 권리가 없나 당국에 신고후 요로 왔다 아이가 절대 몬나간다”
핏발선 눈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노려보며 소리소리 지르고 돌이 날고 뭉둥이가 휘둘리고 곡괭이로 여기서 그런일들이 1957년 그 어느날 그 날에 그 날에 그 한날에 한 숨만 참았다면 잠시만 멈추고 다음날 다시 생각하고 만났으면 아, 이 언덕 배기 밭뙈기 한토막 때문에...
오늘 이곳엔 파도의 소리 따라 흰 메밀꽃이 슬픔의 하이얀 눈물 방울처럼 흩어져가고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얼마전 까지만해도 흐리고 비오는날에는 이 근처에서 헛것을 본 마을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들었다.
그럴것이다. 그렇게 죽어간것이 얼마나 억울했으면 뜨거운 눈물 한줄기 흘러서가는 밭고랑 따라 메밀꽃 흐드러지게 피어난 저 붉그레한 흙 한줌 쥐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져간 그 꿈들은 자라지못한 납작풀밭아래 낭떠러지 끝 비탈진 소나무 숲사이로 *“뜨물같이 흐린"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다.
*백석의 시 “쓸쓸한 길"에서 인용 함

서울지사장 김학명

2021년 09월 09일 10시 24분 /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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