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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박재삼, 최송량, 그리고 우보(牛步) 박남조
경남 사천 혹은 삼천포 지역의 정신문화의 상징처럼 된 시인은 박재삼이다. 그의 시세계는 한국의 시조 전통이나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우리민족 정서인 恨의 감수성에 닿아 있다 ......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19) 고려 제8대 현종대왕의 고향

  고려 제8대 임금 현종(992~1031)은 묘호는 현종, 시호는 원문대왕 휘는 순, 승려시절 법명은 선제(禪薺), 파란 만창 한 삶을 살아왔다. 왕건의 8번째 아들인 아버지 왕 욱은 고려 5대왕 경종의 왕비 황보와 정을 통해 아들 순을 낳았다. 어미는 출산하고 바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 왕욱은 사수현 귀룡동(현,사남면)으로 귀양 왔다. 왕순은 보모에게 두 살 때까지 키워져 6대 성종 임금을 보고 아버지라고 계속 부르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보내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지는 못하게 했다.
아들 왕순은 지금의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 배방사에 거주했다. 욱은 매일같이 사남면에서 배방사까지 찾아가 아들 순을 보는 즐거움으로 귀양살이를 했다.
아들 순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8살 때 귀경했다(6년 사천에서 거주). (“고려사)4 현종 서문, 같은 책 90종실 1 태조자 안종 욱)
현종은 1015년(현종6년) 윤6월에 교서를 내려“사수현을 승격시켜 사주로 하라”는 명을 내렸고 재위 3년(1012) 2월에는 “짐이 지난번 사수현에 있을 때 어효, 효칠 두 사람은 항상 나의 좌우에 있으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나를 도와주었으니 그들에게 좋은 땅을 주어 공로를 포상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또한 재위 13년(1022) 2월에는 호부에서 “사주는 풍패의 땅인데 전에 만전을 감하여 궁장에 소속시켰더니 백성들이 조세를 감내하지 못합니다. 사주 경내에서 공전을 그 수량으로 보상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언하니 그를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풍패지지(豊沛之地)나 풍패지향(豊沛之鄕)은 중국의 한나라 고조 유방 황제가 출생하고 자란 곳이다. 즉 임금이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의미하는 “왕조의 본향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여러 기록을 보아 현종은 어린 시절을 지냈던 사수현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던 것을 알 수 있어 사천이 현종의 어린 시절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어 사천을 풍패지향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왕욱, 사천에서 이들 순을 만나다
사천의 성황당산과 그 아래의 귀룡동 능화, 고자치 등은 고려 왕건의 여덟 번째 아들 왕욱과 관련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그는 경종의 네 번째 비인 효숙 왕후 황보씨와 사통하여 애를 배게 한 일로 이곳에 유배 되었다.
지리에 정통하였던 그는 어느 날 금 한주머니를 아들에게 몰래 주면서 “내가 죽거들랑 이 금을 술사에게 주어서 사수현에 있는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장사 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고 유언과 같은 말을 남긴다.
여기서 이르는 성황당은 달리 서낭당 또는 성황사라고도 하는 데, 고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을 모신 곳이다.
성화란 중국에서 도성의 수호신인 성황신을 일렀으나 점차 지역의 길흉화복을 조절하며 사후세계를 주관하는 신으로 변해 중국에서는 북제와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 때 보편화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종 대에 들어 와서 인종~의종 대에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곳 사수현 성황당은 도입기의 사례로 확인된 것이다.
부자유친의 감동을 전하는 고자치
뒷날 현종이 순의 어머니 황보 씨는 왕욱이 사수현으로 유배 간 뒤에 아이를 낳다가 죽자 성종은 유모를 뽑아 어린 아이를 기르게 하다가 종국에 유배가 있는 아버지 가까이에서 자라도록 배려해준다.
그러나 같이 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아서 왕욱은 유배지 가까운 정동면 장산리 배방골(뱅아골)에 있던 배방사에 기거하던 아들을 만나기 위해 2년을 하루같이 배소에서 절로 오갔다. 지금도 그곳에는 그때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아들을 돌아보곤 하던 고개를 고자치 또는 고자곡 고개라 불렀다는 지명 생성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부자유친을 품고 있는 이 이야기는 지금도 수원의 지지대 고개에 얽힌 사연에 버금가는 감동을 전한다.
<고려사> 안종 왕욱 열전에 이어지는 내용을 살피면 그는 풍수지리에 능한 듯하다. 성종 15(996)년 에 왕욱이 귀양지에서 죽자 당시 네 살이던 순은 아비의 유언을 받들어 장사지내고, 이듬해 개성으로 돌아가서 목종에 이어 왕이 된 뒤인 현종 8년(1017) 4월에 무덤을 건능으로 이장 했다.
사천 땅에서 왕욱을 장사 지낸 곳이 지금의 사남면 우천리 능화마을인데, 여기서 제대로 발복을 하였는지 훗날 그의 아들은 고려 8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현종이 소싯적 우거했던 배방사
당시 욱의 아들 순이 이곳에 유배와 있던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기거했던 배방사가 있던 곳은 장산리의 으뜸마을인 대산마을이다.
이 마을 북쪽 배방골은 그가 기거 했던 절의 이름을 따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이 절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 불우에“배방사의 옛날 이름은 노곡이며, 와룡산(지금의 천금산)에 있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절에 우거하면서 뱀 새끼를 보고 시를 지었다“작디작은 뱀 새끼 약포의 울타리로 도는구나. 온몸에 붉은 무늬가 제대로 아롱졌다. 언제나 꽃 숲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하루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으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시는 먼 남쪽 바닷가 한적한 절에 몸 부치고 살던 자신의 처지를 뱀 새끼에 빗대어 옮은 것으로 언젠가는 곡령(개성의 송학산 이름)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라는 강한 염원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바람은 아버지 욱이 유언처럼 남긴 귀룡동에 복시 이장하면 발복케 되리라는 도침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대산 마을에서 복상마을 쪽으로 이어지는 옛길이 잘 남아 있어서 어린 아들을 만나러 이 길을 오갔던 왕욱의 심정을 아비의 마음으로 되새기며, 배방사가 있던 배방골로 길을 거슬러 올라가 먼발치에서 절터를 헤아리며 사하촌을 서성이다 다시 길을 잡아 고자실로 든다.
이 마을에서 강 건너로 바라보이는 마을이 지금은 학촌리 학촌마을 이다. 마을 이름은 바로 왕욱과 그의 아들 순이 남긴 애잔한 부자유친의 정을 품고 있는 고자치 이래에 자리 잡은 장소성에서 비롯하였다.
<참고문헌:사천시사>

본지주필·사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김을성

2020년 07월 30일 11시 15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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