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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사천 역사의 현장 모자랑포(茅茨廊浦)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전라 좌수군과 원균이 지휘한 경상우수군이 임진년 5월 29일 만나서 전선 23척과 거북선 2척이 처음으로 사천해전에 출전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사천해전에서 왜적을 바다로 유인해서 13척 모두를 분멸(焚滅:불에 태워 없애다)시켰다. 이곳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왼쪽 어깨위쪽에 총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다 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사천해전에서 왜적의 배 13척을 완전 격파한 군사들을 그날 밤 날이 저물어 “모자랑 포”에 정박시키고 군사를 쉬게 했다.
전과를 점검하고, 보고 받는 자리에서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벗자 피에 젖은 옷을 보고 군관이 놀랐다고 한다.
이충무공은 이날 하룻밤 지낸 곳이 “모자랑포”에서 주무셨다고 난중일기에 적혀있다. 과연 모자랑 포의 위치를 찾아보도록 사천 해전의 역사기록을 재조명하면서 모자랑포를 추정한 곳을 찾아본다. 시민 여러분들께서도 모자랑포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사료(史料)나 자료(資料)가 있는 분들께서는 본지 편집실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집자)
모자랑포는 428년전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해 5월29일(양력 7월8일) 전선 23척 중에는 처음으로 출전한 거북선 2척을 앞세운 이순신 함대가 사천 선창에서 적선 13척을 불태우고 밤 세운 곳으로 이순신의 일기(난중일기)와 장계(장계: 임금에게 글로서 보고하는 것)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인 현장이다.
이러한 곳을 우리지역의 이순신 장군이 모자랑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전한 곳 등을 이곳저곳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어느 곳이 역사의 현장인가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여 추정한다.
모자랑 포를 찾기 위해 여러 고서나 고지도 등을 찾아 조사를 하였다. 모자랑포는 120여 년 전에 없어진 명칭이며, 마을이나 리와 같이 작은 규모의 지명이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자료와 진주읍지에서 찾아볼 수 있었으며, 기록한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이순신의 임진일기 책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장계초고, 조정에 보고한 장계일기와 진양지에 있었다.
모자랑포의 최초기록은 현재 현충사에 보관중인 국보 제76호 이순신 친필 일기 원본 즉, 친필일기초 7책중 “일진일기”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임진년(1592년) 5월1일부터 계사년(1593년) 3월22일까지 일기 27장이 적혀 있다. 그 뒤에는 조정에 올릴 장계 초안을 기록한 장계초고, 편지 초안을 기록한 서간초고 및 낙서 등이 실려 있다.
그 중 하나의 장계초고에 “고성지 모사랑포”(固城地 毛思郞浦)가 기록 되어 있다.(원본 별첨 1참조) 이 기록은 사천해전(5월29일)과 당포해전(6월2일), 그리고 6월5일 당항포 해전 직전까지 전투과정과 왜선의 움직임 등을 기록하다가 마무리하지 못한 글이다.
따라서 이글은 임진년 6월14일 조정에 보고할 장계내용을 일기장에 기록한 장계초고라고 한다.(참고문헌: 충무공전서, 잡저(忠武公全書, 雜著)
이글 중에 모자랑포가 포함 된 글은 다음과 같다. “왜놈의 머리도 많이 베고 또 왜장의 머리도 베었으며, 배는 남김없이 분멸하였습니다. 이튿날 6월초1일 고성 땅 모사랑 포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습니다.
상기 “6월초1일 고성지 모사랑포 결진경야(固城地 母思郞浦 結陣經夜)”는 이순신 장군이 전쟁이라 날짜를 혼돈한 듯하다.
당시의 임진년 6월 초1일 일기에서는 “사랑 뒷 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3면에 계속>
모자랑포의 두 번째 기록은 전술한 장계초고를 바탕으로 임진년 6월14일 조정에 보고한 장계“이도 당항포 등 승첨계본(二度 唐項浦 等 勝捷啓本)” 내용 중 5월29일 밤을 “이지사천지 모자랑포 결진경야(移至泗川地 毛自郞浦 結陣經夜)”로 기록 되어 있다.
이는 임진년 5월29일 최초 출전한 거북선을 필두로 사천선창에서 왜선을 분멸하고 그날 밤은 이동하여 사천 땅 모자랑 포에서 지냈다.
즉 모자랑포가 임진일기 책 후반부에 기록한 장계초고에서는 “고성지 모자랑포”로, 실제 조정에 보고한 장계에는 “사천지 모자랑포”로 지역과 지명이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이순신의 임진일기 1592년 5월29일에는 거북선과 밤을 지낸 장소 모자랑포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모자랑포 3번째 기록은 이순신의 친필 일기 임진년 8월24일 에 기록되어있다. 기록을 보면 “8월24일 晴(청. 맑다)” “3경(밤 12시 쯤)에 달빛을 타고 배를 몰아 사천 모자랑포에 이르니 벌써 날이 새었다. 새벽안개가 사방에 끼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원본 별첨4 참조)
8월24일 일기에는 사천 모자랑 포로 되어 있다. 처음은 고성으로 그 뒤 두 번째는 사천으로 썼다. 이는 당시 진중지도에 모자랑포가 속한 지역의 경계 표시가 없었던지 아니면 표시가 없었다고 판단된다.
참고로 8월24일과 25일 일기에서 이순신 함대 이동 항로를 보면 동헌(전남 여수)에서 오후 4시 출발→노량 후양 도착→12시 출발→모량포 새벽도착→8시 안개가 걷히고→삼천 전양 도착하였다.
여기 노량 누편 바다에서 출발하여 삼천 앞바다로 가는 도중에 모사랑량포를 경유한 이유는 무엇일가? 모사랑포를 경유하지 않으면 더 빨리 갈 수 있는 지형인데, 그것은 그 시각 조류와 해풍이 모사랑포 방향이던지 아니면 모사랑포에서 식량이나 식수를 싣기 위함일 것이다.
*참고로 상기 3건의 기록으로는 모자랑포 위치를 확정 지을 단서는 없다. 그러나 다음 사항들은 명확하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모자랑포가 사천인지 고성인지 혼돈 했다는 것.
모자랑포가 노양후양에서 삼천전양(현 삼천포)로 이동하는 해롤 주변에 있다는 점.
“사천지 모자랑포 결진경야(泗川地 毛自郞浦 結陣經夜)”와 “사양후양 결진경야(蛇梁後洋 結陣經夜)”를 비교해 보면 전자는 군항에서 내려 사천 땅 모자랑포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는 뜻으로, 모자랑포가 바다를 낀 동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모자랑포는 사천시 남양동 대포동 바닷가의 진치개라고 불리는 곳이며 지금도 진치개가 있으며, 이진치개(모자랑개. 모치강)는 진이 있었던 곳을 의미하며 진치개라는 지명은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진을 쳤다는데서 유래 된 것으로 사료된다.
모자랑포의 기록은 진양지에서 찾을 수 있다. 진양지는 경상도 진주목(현, 진주시) 읍지로 임진왜란 발발 30년 뒤인 1622년부터 1632년간 10년에 걸쳐 성여신 등의 진주 유림학자들에 의하여 편찬된 것으로 제1책 목록에서 각리-남면- 말문리 19 쪽을 보면 말문리는 “재주 남 60리 동 고성계(이현) 남 삼천진(사천계)서 해포 북 사천계. 동서 15리 남북 15리 속방(屬坊) 11(적례. 무임포. 골동. 송포. 용두. 이현. 수내. 검안. 죽사. 역촌. 모자랑포)기록 되어 있다.
당시 말문리는 진주에서 남쪽으로 60리에 위치했으며, 동쪽에는 고성 이현, 남쪽에는 사천 삼천진. 서쪽은 바다. 북쪽은 사천 경계로 진주목에 속해 있으면서 진주계와는 별도로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진양지에 기록되어 있는 각리와 속방들이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하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말문리 11개 속방 중에 바다와 접하는 속방은 3곳(무임포. 송포. 모자랑포)이며 그 중에 모자랑포(茅茨郞浦)가 있다. 이순순 장군의 장계초고와 장계, 그리고 일기에서 찾은 모자랑포(毛自郞浦), 모사랑포(毛思郞浦)는 장군께서 “모자랑포(茅茨廊浦)”의 음을 따서 쓴 듯하며, 모자랑포(茅: 띠모, 茨:지붕 이을 자. 廊: 사랑채 랑. 浦: 개포)는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이 있는 바다가라고 풀어본다.
그렇다면 500여년 전에 모자랑포 바닷가와 그 주변에 여러해살이 띠풀이 많이 자라고 있었고,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에서 바다고기를 잡는 좀 억센 사람들이 오랫동안 자연인 그대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진양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순신의 사천 해전 당시 해안 지역의 관할을 보면 사천 선창과 그 주변은 사천 현지역이며, 그 남쪽과 북쪽은 진주목 지역이다. 즉, 바다쪽에서 보면 사천이 진주목 구역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진주에서부터 사천을 지나 60리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말문리의 속방 모자랑포는 이순신의 사천해전 격전지 사천선창에서 남측해안에 자리 잡고 있던 지역 명칭 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천선창에서 승전하고 이동하여 밤을 보낸 茅茨郞浦(毛自郞浦. 毛思郞浦)는 이곳 진주목 남면 말문리 모자랑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사천현 해안 지역, 사천 선창 주변에는 모자랑포의 지명이 없었다.(이어서 다음호 신문에 게제)
참고문헌: 사천문화 제19호(2016) 전 사천시 의회 의원 서일삼). 난중일기. 진양지. 임진왜란거북선 최초 출전지(한국국제대학 이우상 교수). 이순신리더십아카데미 최원석). 삼천포지명지(삼천포무화원). 2020인문학살롱(제장명.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김을성 기자 kimes4000@naver.com

2020년 09월 10일 11시 38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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