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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의 숨은 항일 애국 투사 우보(牛步) 박남조(朴南祚)선생의 시조시비 건립추

  우보 박남조 선생 선양회의 시조시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황인성)에서 한려해상국립공원 남해사무소, 사천신문 후원으로 전체 예산 650만원을 들여 2단 석비를 2021년 상반기에 사천시 신수도(新樹島)에 세울 예정이다.
이 시비는 재경 삼천포고등학교 동문회 사무총장 김학명(신수초 23회), 신수도 초등학교총동창회(회장 탁종용), 신수도환경연합(회장 김학상), 신수도배경 "올빼미 무덤"의 저자인 강희진 작가와 김진환 소설가, 정삼조 시인, 김진식 향토사연구자 중심으로 하여 우보 시조시비(공덕비)건립추진위를 결성하였다.
박남조(1909.2.12.∼1995) 시조 시인은 사천시 남양동 출생으로 진주 제2보통학교와 교육자 양성 기관인 경남사범학교(3기)를 3학년 2학기 중에 일제에 의하여 퇴학 당하고 말았다.
보통학교 시절 '동무사'라고 하고 동인지 '동무'를 등사판으로 5호까지 펴낸다. 민족정신이 투철한 소년들의 모임인지라 피 끓던 청년들은 항일정신을 흩뿌린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 적발이 되어 등사시설은 빼앗기고 폐간되고 말았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참여한 학생들은 정학 또는 근신 처분을 당했다.
동무사 사건으로 근신 한 달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본 경찰 고등계 형사 주임의 무심코 뽑은 일기장 수색으로 아래의 일기 내용과 같이 일본천황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증오하였으니 사범학교 퇴학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 같다.
『1924.2.11(맑음) 오늘은 이른바 일본의 기원절이다. 일본의 기원절과 우리 조선 사람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좋으면 자기네들이나 좋아하라지. 원수 같은 놈들, 저희는 잘 먹고 잘 살아 거들먹거리고 불쌍한 우리들에게 고리대금이나 해먹고...』
『1924.4.29 오늘이 일본의 천장절이란다. 무슨 놈의 기념할 날이 이리 많은 고. 신문에 보니, 일본 황실에서 1년 동안에 써 없애는 돈이 300만원이나 된단다. 이 모든 돈이 우리 조선인의 혈세로 충당될 것이니, 이는 우리의 피를 빠는 것과 다를 게 무어냐?』
이후 1929년부터 13년간을 뜻을 함께 한 몇몇 청년들과 규합하여 신수도에 입도한 후 보명학회(普明學會)를 결성하여 주민 소득증대와 복리증진을 위해 노력하였고, 야학(관리학교)을 열어 오전, 오후, 야간반으로 나누어 문자 해독과 기초 산수를 가르치고 민족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1930년 동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과 시요 등을 발표하였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소설 부문에 "젊은 개척자"가 입선되어 신수도에서의 자립경생과 문맹퇴치를 위한 개척자 생활은 바로 선생의 문학 세계의 한 이상적 인물을 현실 세계에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55년 한국문인협회 삼천포시 지부를 결성하여 중앙 문단으로부터 인준을 받아 1955~1957 협회장과 1958~1964 삼천포예총지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삼천포 향토문화제인 노산문화제와 한려문화제의 대회장으로서 행사를 주최하여 그의 애향심과 문학심을 짐작할 수 있다.
1979년 시조집 「바닷가 에서」를, 1985년에는 삼천포 지역의 민요를 손수 채집한 「내 고향(故鄕) 민요(民謠)」를 펴냈다. '내 고향 민요집'에는 삼천포와 인근 도서의 다양한 아동요(兒童謠), 어요(漁謠), 농요(農謠)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토록 항일 투쟁, 멸사봉공의 개척자적 생활과 사라져 가는 전통 민속을 안타까워하고, 무례와 비리가 거리낌 없이 난무하는 사회를 개탄하면서 일평생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무심한 세월을 원망도 할 줄 모르고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통합시 이전의 동 지역 문화제는 1960년 향토문화제를 시작으로 개항 경축 향토문화제, 노산문화제, 한려문화제로 이어져 오다가 1989년부터 시민한마당 큰잔치로 이름을 바꾸어 17회를 끝으로 지방문화제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995년 5월 10일 도· 농 통합 정책에 따라 삼천포가 사천과 통합됨으로써 이 고장을 대표하는 영산(靈山) 와룡산의 기상을 따서 와룡문화제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올해 제25회 와룡문화제는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됐다.
다음은, 사천시 문화창달(文化暢達)에 일조한 박남조 제3회 삼천포 노산문화제 대회장의 축사 전문이다.

지리영봉은 남으로 뻗쳐 삼천(三千)의 포구(浦口)가에 와룡의 웅자를 영상(映像)하고 출렁이는 현해(玄海)의 창랑(蒼浪)속에 두미(頭尾), 사량(蛇梁), 수우(樹牛), 신수(新樹)의 도서들이 점재하여 학섬, 목섬에 서식하는 후조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에 노산(魯山)이란 삼천포문화발상의 터전이 이룩되었으니 즉 한국말엽의 호연제(호연재 浩然齋) 보흥의숙 시절로부터 노산보통학교 노산야학교를 위시하여 청년회 부녀회 소년단 등 혹은 기미만세 시 우국지사들의 본거지로 또는 일제 반항 애국투사들의 회의소로 더욱이 대한독립만세의 노도 같은 함성과 같이 태극기를 처음으로 휘날린 곳으로 실로 노산은 오늘의 항도 삼천포를 이룩하는데 매거(枚擧)할 수 없는 삼천포 문화의 산실이요, 민족혼 수호의 모체였다.
일제의 압정으로 인하여 호연제나 학교 같은 건물들이 강제철거 또는 파쇠당하고 폐허의 빈 터전만 남았으나 유서 깊은 문화의 원천지를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제1,2회 시 향토문화제의 칭호를 올해부터 「노산문화제」라 이름 지은 바다.
문화의 꽃 찬란하고 그 향기 그윽한 곳에 민족의 드높은 영화(榮華)가 깃 드는 것이며 각양의 문화행사를 해마다 거듭하는 것은 진선에 싸여서 미속에 살고 싶은 염원에서다.
노산문화제는 노산 주변의 숨은 문화재를 발굴하고 노산지역의 문화수준을 높이는데 그 뜻을 둔 것이며 비록 초라한 광장에 푸성짐 없는 잔치나마 호수 같은 남해에 노산문화의 씨앗을 던져 근역(槿域) 포포만만(浦浦灣灣)에 천자만홍(千紫萬紅) 백화(百花) 난만의 찬연한 시절을 바라는 마음에서다.
1966. 11. 16
제3회 삼천포 노산문화제
대회장 박 남 조

자료 출처 : 강희진 소설가, 김진환 소설가 「마루문학 (창간호) 우보 박남조 선생, 그의 항일정신과 문학세계」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0년 10월 15일 10시 59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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