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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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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44) 선진항(船津港)

  선진항(船津港)으로 추정된 위치는 1960년대 말부터 간척화 사업으로 육지화가 되었다.
사천만 연안 동쪽에 입지한 선진항은 고려 초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해상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여 온 항(港) 포구였다. 역사적으로 고려 때에 전국 12조창의 하나인 사천군 읍남면 통양리에 통양창(通洋倉)이 설치되어 조선 초기까지 조운(漕運)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稅穀)을 개경으로 운반한 전초기지였다.
조선시대에는 관방(關防)의 길목을 지키는 진보(鎭堡) 및 선진(船鎭)이 설치되어 조운선의 안전수송과 왜구에 대비한 군사적 요충이었다. 선진리성의 옛날 지형을 설명한 글을 보면 남, 서, 북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동쪽만이 육지와 연결되어 전략상 요충지였다는 설명이 있는데, 지금은 매립이 되어 종포 항공국가산단 조성이 진행 중이며, 임진왜란 때는 사천해전과 조명연합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이어서 사천바다는 세계 최초 거북선 출전지인 셈이다.
고려시대부터 사천시 용현에 소재한 선진(船津)과 늑도동에 있었던 구라량(仇羅梁)은 진(津)과 양(梁)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했으며, 고려사에는 성종11년(992) 공전조미(公田租米)를 거두기 위하여 남도(南道)에 12조창(漕倉)을 설치하였으니 그중의 하나가 사천의 통양창(通陽倉)이었다.
선진에는 통양창이 있었고 구해창, 가산창이 있었으며, 삼천포지역에는 통양창의 외창인 통창(통영창), 순영창, 우병영창이 있었고, 조선 순조 때 창선도와 적량첨사와의 군사연락을 위해 대방동에 축조한 대방굴항이 있었다. 이 항에는 군사 300명과 전함 2척을 상주시킨 병선의 정박지 역할을 한곳이기도 한데 이러한 시설들이 모두 지금의 항만 역활을 담당한 곳이었다.
1950년도 이전에는 선진항에서 서포를 다니는 나룻배가 있었고 곤명의 본촌, 금성, 연평 등에 나룻배가 운행이 되었다. 삼천포항에는 하동 진교를 1일 1회 운항하는 동아호(정원 78명)가 삼천포와 남해 미조를 다니는 경전호(정원 131명), 삼천포와 남해 지족을 다니는 남양호(정원 70명)가 있었으며, 1일 2회 왕복하는 선박은 삼천포와 남해 동대를 다니는 금산호(정원 74명) 등이 1950년 말까지 운행을 하고 있었다.
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는 구한말 개항 당시 사천군 읍남면 선진리의 지역으로 화계(花溪)라 불렀다. 사천선창(泗川船滄)과 통양창이 위치했던 포구를 말조포(末潮浦)라고 불렀으며, 고려 때 조창을 설치할 무렵부터 통조포(通潮浦), 통양포(通陽浦)로 변천하여 구한 말 때는 화계동이라 하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선진의 지명이 여럿 나타나는데 이를 살펴보면 이순신장군의 사천해전 때에는 선창(船滄), 정유재란 때에는 법질도(法叱島), 신채(新寨), 동양(東洋), 동양창(東洋倉)으로 기록하고 있고 조선 후기에는 이곳에 삼천진보(三千鎭堡)가 설치되어 선진(船鎭) 또는 선소(船所)라 했다.
화계라는 지명의 내력은 자세하지는 않으나 통양포가 갖는 본래의 기능적 이미지가 상실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 명칭 개정 때(측도연도 1909년 국립중앙박물관 지도 참조) 화계(花溪), 연포(連浦), 통양(通洋) 일부를 포함하여 사천군 읍남면 선진리로 개칭되었다.
1832년(순조 32년)의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사천현읍지(泗川縣邑誌) 중 사천현 지도를 보면 선소(船所)라는 지명으로 나오고 1907년 지방행정구역정리시의 기록에는 화계동(花溪洞)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는 ‘곶개'가 ‘화계'로 음·훈차(音·訓借)되었다고 본다. '돌출'의 뜻을 가진 ‘곧'은 땅이름에서는 차츰 ‘곶'으로 정착되었다. (지도참조)
이 ‘곶'은 대개 어떤 돌출된 지역을 나타내는 뜻으로 씌어 반도의 끝부분인 곳에 ‘장신곶', ‘장기곶'같은 곶 지명이 생기게 되었으며 곶은 대개 ‘곶串'이라는 한자를 빌어 적었고 더러는 ‘꽃'으로 변해 한자의 ‘화(化)'자를 쓰기도 하였는데 ‘곶'은 ‘꽃'의 옛말이기도해서 한자의 꽃화(化)자로 취해진 것이다.
곶은 꽃화(化)자로 훈차(訓借)되고 개는 시내계(溪)자로 음차(音借)되어 화계(花溪)라 불렀으며 원이름은 곧개→곶개가 화계로 한문식 표기를 하였으리라 본다. 이를 유추해 보면 곶(돌출한 땅, 땅의 한 끝부분이 어느 한편으로 불쑥 벋어 나간곳)+개(물가)와 상통하지 않은가.
선진항의 개척은 서부경남 내륙을 용이하게 출입하려는 일제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1912년 봄, 부산기선조와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가 합병하여서 조선기선회사로 발족됨에 따라 당시 스가 칸베에(須賀勘兵衛)란 일본인이 선진항을 개척하고 부산, 여수, 목포간의 정기선을 기항토록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로부터 선진항에는 조선기선회사의 지점인 스가회조점(須賀回漕店)이 개설되고 대합실과 창고, 여관 등이 들어섰으며, 항만시설은 갯벌을 매립하여 간이 선착장이 축조되었다. 따라서 이미 개통된 바 있는 삼진가도의 중간지점을 연결하는 2.5km의 도로도 개통되어 이로부터 진주 방면에 이르는 해상교통은 거의 이 선로(船路)를 이용하게 되었다.
개항 초기부터 경남 서부지역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선진항을 통해 들어왔으며, 당시 진주에 거주한 요시다 죠지로(吉田常次郞)란 일본인은 객 마차를 운영하고 있었다. [진주대관](晋州大觀, 1940년 간행)의 저자 카치다 이스게(勝田伊助)는 책자 첫 머리에 “1913년 봄, 선진항에 상륙한 나는 마차에 흔들거리며 긴 여행 끝에 처음 진주에 들어와 배다리(船橋)를 건넜다.”는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선진항은 진주 및 서부경남 일원의 자원개발을 위한 일본인들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던 셈 이었다.
1914년, 1916년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의 선진리와 통양리 자료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이곳에는 일본 동양척식주에서 보유한 땅이 42필지(선진 31필지, 통양 11필지)이며, 일본인 토지 소유자 총 31명이 소유한 건물·토지가 117필지로 파악됐다. 물론 가족을 포함하면 100여명의 일본인이 거주했으리라 추정된다.
참고문헌 : 사천시사, 서울대 규장각, 국립중앙박물관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1년 04월 08일 9시 01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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