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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천년을 이어 탄생된 『환단고기』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 저술한 『환단고기』는 1911년 독립 운동가인 계연수(1864~1920) 선생이 신라 때 고승 안함로(579~640)와 원동중(생몰연대 미상)의 『삼성기三聖紀』, 고려 공민왕 ......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63) 팔장포(八場浦)에 세워진 에히메촌(愛媛村)Ⅱ

  야마모토 모모기치 일행은 우선 일본 섬의 원조를 얻어서 조선 삼천포 동금리에 세 채의 나가야(長屋 : 긴 뱃집으로 지금은 헐리고 없어졌으나 동금동 벅수골목에 있었던 긴 집)를 짓고, 앞으로 올 사람들을 위해서 바로 옆의 향촌리에도 장옥을 지었다. 동금리와 향촌리의 일본인촌을 에히메촌(愛媛村)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주주택은 25호가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주 주민이 삼천포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나가야인 장옥(長屋)이 완성되어 있었고, 나가야 부근은 모래땅(沙地)이었기 때문에 경작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고등어 떼가 큰 바다를 가득 채우고 흰 소용돌이를 이루어 고기 몰려다니는 소리를 내어 일본인들을 들뜨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등어망은 히로시마현의 멸치망의 구조를 흉내내서 만든 것으로, 고기떼를 둘러싸면 무리는 망의 앞으로 떨어져서 거의 어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거기에 개량을 더해서 분동식(分銅式)으로 고쳐, 겨우 바라던 만큼의 어획물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에히메촌은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들어오고 나서 삼천포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고 와카미야신사(若宮神社:선구동 망산) 혼간지포교소(本願寺布敎所:선구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음), 삼천포우편소(현 동서동 사무소앞 4거리자리) 등이 설치되었다고 에히메현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890년대 말에 일본은 점차 조선해 출어가 전 현 규모로 확대됨에 따라, 에히메현에서는 원양어업장려보조규정(1899년)과 원양어선보조규정(1900년)을 만들어 지원과 보조를 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보조와 더불어 조선해 통어는 러· 일전쟁까지 더욱 확대되게 되었다. 현에서는 1905년에 원양어업장려보조규칙을 제정하고 에히메현 원해출어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지원과 통제를 통하여 조선해 어업지배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1914년 경에는 우오시마, 마사귀촌, 후타나촌의 에히메현의 3대 출어촌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우오시마는 현 전체의 출어선수와 출어인구, 어획고에 있어, 거의 4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조선해 출어가 성행한 보기 드문 섬이라고 하겠다.
한편 1902년, 3년 경부터 이주어업자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1906년부터 가옥 건축과 전지매수에 대한 현비 보조가 시작되고 우오시마촌에서는 1914년경에는 구조라(거제)에 소우오시마촌이라 일컬어질 정도의 자주어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에히메현에서는 한·일어업협정의 체결과 더불어 보조이주어촌의 경영에 착수하여, 1915년까지 6개의 후보지를 선정하고 있으며, 1909년, 10년에 현비보조로 삼천포면 동금리 팔장포에 어사 24호(67명)를 건설하고 동군(同郡)신수도에는 21호 54명으로 오이타현의 단체이주어촌을 형성하였다. 1911년에 24가족을 이주시켜 에히메촌을 개촌하고, 고등어 건착망으로 전호 균등 출자하여 경영에 착수하였으며 반농반어 정책을 폈다고 한다. 1916년 6월 7일자 부산일보에 의하면 삼천포 어업근거지 에히메촌에 고등어(鯖,さば)가 많이 잡힌다는 기사도 있다.
에히메촌은 지도자 야마모토 모모기치((山本桃吉)의 주선으로 당시의 향리인 니시소토우미촌 우치도마리(西外海村 內伯) 어민을 이주시켜 “우치도마리분촌”이라 일컬어졌다고 한다. 에히메촌은 1921년 말경에는 37호, 건착망 3통, 어선 15척, 경영자수 34명, 연산 560만관(2,250톤)에 달하여 이주어촌 중 1인당 평균소득이 최고 이윤을 올린 어촌이 되었으며, 이리사촌과 함께 남선 굴지의 고등어어업근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23년의 영일만 조난 이후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서고 말았다.
일본인이 삼천포지역에 처음 이주해 온 시기는 1906년 10월 경으로 처음 이주해온 사람은 4호에 13명에 불과했으나 1908년 보조이주어촌인 에히메촌을 건설하면서 3월에는 33호에 1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인구가 늘자 5월에는 일본인회가 조직되고, 11월에는 일본인 소학교가 개교를 하게 되었다. 삼천포항이 일본인들에 의해 개항되고 에히메촌이 건설되면서 오노 이꾸지(大野育二)의 회조부(回遭部)가 1906년 11월 창립되고, 1907년 11월 20일에는 서동 303번지에 우편소가 개설되었으며, 1908년에는 부산기선회사가 삼천포항에 취항하게 되었으며 1908년 5월 29일에는 일본인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1909년에는 삼진회조부(三晋回遭部)가 창립되고 8월에는 전신업무를 취급하게 되었으며 12월에는 법인인 수산회사가 설립을 보게 되어 삼천포지역의 수산업계를 장악하게 되었고 1910년 2월 진· 삼도로(1909년 12월 준공)가 개통을 보았다. 이러한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일본인들은 부산수산조합 감독 보조원을 파견하였다가 12월 10일에는 부산수산조합 출장소를 서동에 설치하게 되었고 미다무라(三田村) 회조부가 재 설립되어 삼천포항은 기선항로의 정기 여객선이 입항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천포지역의 수산업은 당시에는 원시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에히메촌 건설로 선진 수산업을 맞게 되었고 범선에 불과하던 어선이 엔진을 부착한 기선으로 바뀌게 되고 수산업조합이 생김으로써 수산업에 많은 자극을 주었으며 정기 항로의 개발과 진· 삼도로의 개통으로 운송업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1921년 7월 20일자 매일신보 에 의하면 경남의 수도 진주는 근래 비상히 발전하여 시가 체재가 일본가를 형성하였는데 진주목 아래 재류 일본인은 500호에 1,500명이며, 매일 사람이 들어오는 자가 3호 내외라 하며 삼천포는 진주 제일의 교통로인 선진항이 개항한 이래로 육지로는 농업이 발달하여 동양척식주 출장소도 설치하였고, 바다에는 해산물이 풍부하여 大分縣(대분현, 오이타현) 30호, 愛媛縣(애원현, 에히메현) 30호, 山口縣(산구현, 야마구치현) 8호, 熊本縣(웅본현, 구마모토현) 10호의 어업근거지가 되고 특히 대분현에서는 진해와 견줄 만큼 수산을 장악하였고, 자동차 운전도 개시 되어 진주목 아래 일본인 160호 550명으로 인구가 불어났으며 사천읍의 군청소재지에도 일본인 100호 400인 내외가 있다고 되어 있어 이미 많은 일본인들이 사천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참고 문헌 : 통감부의 어업 이민 장려와 어업법 제정, 이영학, 경상남도의 이주어촌, 일제의 조선어업 지배와 이주어촌 형성(보고사 2000년), 여박동(呂朴東) 교수

문화부장 김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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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9월 16일 9시 49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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